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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밭 산책] ------------- 사모님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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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밭 산책] ------------- 사모님이 보고 싶다.

권영호

[글밭 산책] ----------- 사모님이 보고 싶다.

 

권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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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사모님은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적은 예순쯤 되었을까. 보슬보슬한 파마머리에 언제봐도 옷매무새는 단정했다. 절대로 빨리 걷는 법이 없었다. 얼른 보기에도 후덕한 맏며느리였다. 둥근 얼굴에 웃음꽃을 피울 때마다 살며시 드러나는 금으로 덮어씌운 대문니가 부티스러웠다. 아이들이 하교한 텅 빈 운동장, 학교 화단에 활짝 피어있는 꽃구경을 즐기셨다. 독실한 기독교 신도로 권사님이었다. 내게 남아있는 사모님에 대한 기억이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았던 내가 근무했던 면 소재지 시골 학교는 도 교육청이 지정한 예절교육 연구학교였다. 교장 선생님께서 우둔했던 내게 연구학교 업무를 추진하는 중책을 맡기셨다. 연구학교에 주어진 과제 해결을 위한 주제의 설정, 추진 내용 및 방법, 평가에 이르기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았다. 학년 초, 담임하고 있는 학급 일만 해도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나의 하루는 언제나 노루 꼬리처럼 짧기만 했다. 하는 수 없었다. 모든 직원이 퇴근한 후 아예 교무실에 남아 연구학교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교무실에서 혼자 야근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교장 선생님 사모님이었다. 학교 운동장 동쪽 끝머리에 사택이 있었던 터라 교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오신 것이다. 사모님의 손에는 예쁜 보자기를 덮은 쟁반 하나가 들여있었다.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드렸다. 

  “이거 초벌 부추로 구운 전이에요.”

  사모님이 쟁반을 내밀면서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셨다. 여태껏 그날 맛나게 먹었던 그 부추전은 잊을 수 없다. 눈 깜박한 사이에 다 먹었다. 

  “권 선생님!”

  “네. 사모님!”

  사모님이 막 젓가락을 놓은 내 손을 꼬옥 잡으셨다. 가끔 내 손을 잡고 흐믓한 눈으로 바라보던 내 어머니와 꼭 닮았다.

  “앞으로 선생님은 잘 살거야. 이름 석 자도 빛날 거고,”

  속삭이듯 말했던 사모님의 목소리였는데 내게는 아주 카랑카랑하게 들렸다.

  “나는 평생을 새벽 기도를 다녔어요. 오래전부터 권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 모두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거든요, 앞으로도….”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다니 깜짝 놀랐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고마웠다. 그런데도 고맙다는 말을 못하고 교무실을 나가는 사모님 뒤를 따랐을 뿐이었다. 운동장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달빛을 밟으며 사택으로 돌아가시던 사모님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해 가을, 교장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출되셨다. 사모님과 헤어져야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사모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어떤 이유로 나를 위한 기도를 해주셨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도 흘렸다. 오래전 나는 4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대과 없이 마치고 정년퇴임을 했다. 성인이 된 아들과 딸 역시 제 앞가림하며 살고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행복은 결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이른 새벽, 차가운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사모님의 간절했던 기도 덕분이다. 그런데도 스쳐 간 오랜 세월을 사모님을 까맣게 잊고 지낸 내가 밉다. 부끄럽다.  

  성철 스님이 남기신 범어에는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돌아온다고 했다. 그 보시의 은덕을 누려야 할 분은 바로 사모님이어야 한다. 얼마 전 지인에게 사모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안부를 들었다. 그래서 지난 초파일 날은 사모님께서 아름다운 황혼의 들녘에서 함박웃음 지으며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빌며 부처님께 삼배했다. 처음이었다. 아카시아 꽃향기에 흠뻑 젖은 봄,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하게 떠오른 사모님, 사모님이 보고 싶다. 지금은 아흔이 훨씬 넘으신 그 사모님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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