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산책] [수필] "고마웠데이" 권 영 호

기사입력 2020.09.12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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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밭 산책]  [수필] "고마웠데이" 권 영 호


      “한번 와 주실래요?”

      이른 아침에 걸려온 휴대전화 속, 친구 아내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네. 그럴게요.”

      옷을 차려입는 둥 마는 둥 대문을 나섰다. 운전대를 잡았다.   불길한 예감이 속 가슴을 두드렸다.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 위에 차를 올렸다. 마음이 바빠졌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핸들을 바투 잡은 나는 K 병원에 입원 중인 친구를 찾아가고 있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열아홉 살 되던 해, A 교육대학에 입학식 날이었다.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때까지 우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타향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하지 않았던가.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했다. 근데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햇병아리 교사 이름표를 단 우리는 고향에 있는 같은 학교에 나란히 첫 발령을 받은 것이다. 그 인연 또한 숙명적이었다. 그 후 교직 생활을 하면서 그림자처럼 붙어살았다. 형제처럼 의지하며 쌓아 올린 우정의 탑은 오십여 년 긴 세월이 스쳐 지나갔지만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다. 몇 해 전, 정년 퇴임을 하면서도 오래도록 함께 위안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동반자로 살아가자고 단단히 약속했던 우리였다.

      여느 때처럼 그날도 만나서 식사를 함께했다. 평소 식성이 좋았던 친구가 통 먹지를 않았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몇 달째 소화가 되지 않아 고생해 왔다고 했다. 읍내 내과의원에서 위내시경을 했지만 별 이상이 없었고 오래도록 소화제를 복용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단다. 그러면서도 친구는 “차차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나를 위로했다. 참 미련한 사람이다. 얼른 큰 병원에 가보라며 종용했다. 며칠 후 친구는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췌장암 4기. 말기.’ 의사로부터 3개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잘 듣는다는 항암 주사는 물론이고 약 한 봉지조차 처방받지 못하고 쫓겨나듯 집으로 내려와야 했다. 

      워낙 건장했던 탓에 췌장암 특유의 복통과 황달을 잘 참았다.   한 달을 그렇게 버텼을까.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체력이, 면역력 또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급기야 대구에 있는 K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그 병원 역시 진통제를 투여하여 고통스러운 아픔을 조금 완화 시켜 주는 것 외에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K병원, 000호 병실. 살며시 문을 열었다. 병실 구석구석에 갇혀있는 검은 침묵이 와락 내게로 달려들었다, 

    “며칠째, 통 입을 열지 않아 말문을 닫으려나 했지요. 근데 어젯밤에는 글쎄 ‘영호 한번 만나 보고 싶다.’라고 하기에….”

    친구 아내가 귓속말을 해 주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더나? 오늘은 좀 어떤 노?”

      침대 위에 척 걸터앉으며 친구를 껴안았다. 며칠 사이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등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래도 친구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황달기가 완연해서 눈동자까지 흐릿해진 친구의 시선을 따라갔다. 직사광선을 차단하기 위해 얇게 선팅해 놓은 유리창에 친구와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취었다. 야윈 얼굴에 넋을 빼앗긴 듯한 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내 기억 속에 친구의 그 얼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아마 친구도 마음속에 내 얼굴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긴 세월, 서로에게 의지하며 충실하게 다져왔던 우정의 끈을 이렇게 성급하게 놓아버리려는 친구가 야속하고 밉다. 그러나 아니다. 지금이라도 우정의 끈을 놓아버린대도 나는 괜찮다. 남남으로 돌아서서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절대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세상 어디에서든 몇 년이라도 더 살아만 있어 준다면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친구가 내게로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아주 작게 달싹거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듯했다. 그러나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친구의 입 가까이에 바짝 귀를 갖다 대었다.

      “고마웠데이.”

      모깃소리보다 더 작은 끝말이 내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일은 말이다. 꼭 한번 다녀오재이!”

      친구의 두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곳 병원에 입원했던 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젊은 시절 함께 근무했던 초임지 고향 학교를 둘러보고 싶다고 말이다. 근데 건강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기에 조금만 회복되면 데리고 갔다 와야지 하면서 차일피일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미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서울병원의 의사 말대로라면 친구에게 주어진 날들은 아직 보름은 남아있을 테니 내일로 하루쯤 연기하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을 것 같았다. 

      “내일 올게. 내일!”

      내가 힘을 주어 ‘내일’을 말했던 것은 내일의 나들이를 약속하자는 의미보다 어쩜 마음속으로 생을 포기하고 있을지도 모를 친구에게 내일을 심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 올리는 신비로운 힘을 지녔던 그 ‘내일’을 말이다. 그런데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는 그 내일이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왜 몰랐을까. 

      이튿날 새벽녘, 친구의 부고가 날아왔다.

      젊었던 그 날, 햇병아리 교사의 가슴 벅찼던 초임지의 추억을 찾아 나서기로 했던 내일,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기다렸을 친구에게는 내일이 오지 않았다. 

      내일, 마지막 나들이를 하면서 친구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친구야. 내가 더 고마웠데이!” 

      그런데 끝내 건네지 못한 이 말을 지금까지 간직만 하고 있는 내 마음은 오늘도 아프다.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날,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을 때면 더 많이 아프다.


    권영호 (아동문학가·수필가)

     

    사진(권영호)333.jpg


    ○ 경북 의성에서 태어남

    ○ 기독교아동문학상  동화 당선 (1980)

       계간에세이문학(봄호) 수필 천료(2009)

    ○ 한국문인협회,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새바람아동문학회, 

       대구에세이문학회원, 의성문협지부장역임, 

       경북문인협회아동문학분과 위원장, 

    ○ 창작동화 '날아간 못난이' '봄을 당기는 아이'

       함께 낸 책 '세 그루' '고향에서 부르는 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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