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편집일 : 2020.12.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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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밭 산책] [수필] 그 립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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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글밭 산책] [수필] 그 립 다

권 영 호

[글밭 산책]   [수필]    그 립 다


권 영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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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든 탓일까. 아니면 삶이 팍팍해서 일까. 요즈음은 보고 싶은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어둠 살이 내려앉은 방죽으로 올라섰다. 방죽 한가운데 나 있는 길 양쪽, 풀숲에서 놀란 풀벌레들이 후드득 튀어 올라 바짓가랑이에 매달린다. 그들의 안식처를 예고 없이 침입한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내딛는 발걸음의 숨을 한껏 죽였다. 

한참을 걸었을까. 발걸음을 멈춰 섰다. 휙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몇 발짝을 걷다가 또 뒤를 돌아섰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살그머니 뒤를 따라오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오십 년도 지난 초등학교 육학년이 되던 봄이었다. 식구라고는 엄마랑 단 둘인 희야네가 우리 마을에 이사를 왔다. 도회지에서만 살아서 그랬을 테지만 유난히 뽀얀 피부에 눈이 예쁜 희야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 희야가 내 짝꿍이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나는 행운아였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을 유난히 낯설어했던 희야는 늘 내 뒤만 따라다녔다. 그런 희야랑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나를 처음에는 속으로만 심통을 내던 아이들이 급기야는 드러내 놓고 놀려댔다.

  수업을 마치고 막 교문을 나설 때였다. ‘얼레리 꼴레리 영호 하고요….’ 운동장 한복판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은 아이들이 소리치며 놀려댔다. 민망스러웠다.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후다닥 뛰었다. 희야도 뒤를 따랐다. 그날, 둘이서 도망치듯 헐레벌떡 달려온 곳이 지금 걷고 있는 바로 이 방죽이다. 그날, 정신없이 달려오면서 몇 번이고 생각해 봤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희야의 책임일 것만 같았다.

  “니는 왜 매일 내만 따라다니나!” 방죽에 올라서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희야는 아직도 가쁜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고. 니 땜에 어디 챙피해서 살겠나.” 

  눈꼬리를 치켜뜬 나를 잠자코 쳐다보던 희야가 말없이 입가에 빙긋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그런 희야에게 더 무어라고 지껄일 말을 찾지 못했다. 

  마을 쪽으로 나 있는 방죽 길을 덤벙 걸음으로 걸었다. 한참을 걷다말고  휙 뒤돌아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따라오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멈칫하는 희야를 째려보았다. “니 따라가는 게 아니고 집으로 가는 중인데….” 잔뜩 겁을 집어먹은 희야가 모깃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담 니가 앞장서라.” 몸을 비켜서며 길을 열어 주었다. 희야는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그날도 나는 앞, 희야는 뒤에서 걸었다. 이튿날 그 이튿날도 희야는 놀려대는 아이들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역시 내 뒤만 쫄쫄 따라다녔다. 

  겨울 방학이 다가올 때쯤이었다. 간밤에 놀랄 일이 생겨났다. 희야네가 우리 마을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혼자였던 희야 엄마가 어떤 남자와 재혼하게 되었는데 애물단지 희야를 데려갈 수 없어서 먼 친척 집에 맡기러 갔다던 소문은 지금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부다. 어쨌거나 한 마디 귀띔조차 하지 않고 떠나간 야속했던 희야를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또 떠올린다.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된 걸 모두 자기의 탓이라며 억지를 썼지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던 짝꿍 희야를 말이다. 엄마를 따라 이사 온 새로운 환경에 낯설었던 것보다 어쩜 혼자라는 외로움이 싫어서 내 뒤를 따라다녔을 희야를 핀잔만 했던 게 늘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그 희야도 지금쯤은 할머니가 되어있겠지. 한 번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름져 가녀린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나란히 이 방죽 길을 걷고 싶다. 그런데 여태껏 단 한 번도 소식을 보내온 적이 없는 짝꿍 희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까맣게 잊고 있을 것만 같다. 모든 사람이 그랬듯이 희야에게도 남모르는 아픔들을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을 애써 기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영호하고요 희야하고요…’ 화장실 뒤 흙벽에다 아이들이 써 놓은 낙서를 행여 내가 보면 자기에게 화를 낼까 봐 걱정되어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지웠다던 그때, 희야는 나랑 만들어 놓았던 추억까지도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안타깝다. 슬픈 일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방죽에 올라설 때면 나는 늘 희야를 떠 올렸다. 그 뿐 아니다. 희야가 보고 싶을 때면 이 방죽을 찾아오곤 했다.

  혼자만의 그리움, 아팠던 속마음을 끝내 내색하지 않고 하얀 미소만 남기고 떠나갔던 짝꿍 희야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웬일인지 요즈음에 와서는 더욱 애타게 보고 싶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스스로 주체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리움에 아린 마음을 혼자 달랜다. 그래서 오늘도 ‘그립다! 그립다!’ 중얼거리며 혼자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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