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산책] [수필] 이탈하다 박 월 수

기사입력 2021.01.29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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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밭 산책]   [수필]  이탈하다  박 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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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유인력이 실종되었다. 나른해져서 자리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머리가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멀쩡하던 천장이 기울고 방바닥이 아래로 푹 꺼졌다. 아찔한 공포가 몸 전부를 관통하는 사이 소름이 훑고 지나갔으며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주변엔 달려와 줄 아무도 없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면 찾아온 공포가 사라지려나 싶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천장과 바닥은 제 맘대로 움직였고 눈을 뜨기 힘들었다. 식은 땀이 흘러내렸고 구토마저 나기 시작했다. 

      욕실을 향해 벽을 짚어가며 걸음을 내디뎠다. 한 손은 입을 틀어막은 체였다. 몇 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를 한나절은 걸은 것 같았다. 그런 동안에도 천장과 바닥은 가만있지 않았다. 겨우 변기를 붙잡고 엎어졌을 때 구토는 멈추었지만 어지러운 건 여전했다. 벽을 짚고 방을 향해 돌아오면서 로캉탱을 만든 싸르트르를 떠올린 것도 같다. 멎어있어야 할 사물이 나를 덮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눕는 순간 또다시 중력은 사라졌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몸은 까마득한 암흑 속을 헤맸다. 

      그 무렵 그는 외출이 잦았다. 새로 생긴 읍내 다방에 나이 많은 마담을 자주 보러 다녔다. 식탁에 마주 앉으면 그 여자를 바라보던 그의 은근한 눈빛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나보다 젊거나 그 여자의 치마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괜찮았을지 모르겠다. 내 입안에서는 날마다 가시가 자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물에 잘 풀어지는 비누처럼 헤픈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 

      성마른 그는 나를 밀쳤고 소파 귀퉁이에 내 몸이 처박힌 후에야 다툼은 끝이 났다. 그날 이후 자주 한쪽 가슴 아래쯤이 결렸다. 의사는 갈비뼈 골절이 의심된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어지럼증이 시작된 건 그 약을 먹은 직후였다. 

      처음엔 약의 부작용 때문이려니 했다. 파리한 몰골을 하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이석증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귓속의 아주 작은 돌이 주인 허락도 없이 엉뚱한 곳으로 이사를 해 버린 탓이었다. 양쪽 귀 모두 탈이 났다고 했다. 의사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좌우로 번갈아가며 쿵하고 쓰러지는 운동요법을 처방해 주었다. 빨리 낫고 싶었으므로 벼랑으로 떨어지는 아득한 경험을 쉼 없이 되풀이했다. 

      아내가 평지에서도 멀미를 하는 지경이 되어서야 가정을 이탈하고 싶어 하던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운동할 때를 제외하곤 하루의 대부분을 미동도 없이 누워서 지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원래대로 돌아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더할 수 없이 간절했다. 하지만 꿈속에서조차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날이 많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머리를 살짝 움직여 주변이 돌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습관이 될 무렵 어지럼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미세한 돌이 제 자리를 찾아갔을 뿐인데 흔들리던 몸은 정상이 되어있었다. 작은 돌 하나의 위력이 위대하게 생각 키우는 건 겪어본 사람만이 알 일이다.

      살면서 굳이 몰라도 될 이름을 알고 부대끼고 나도 모르게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가끔씩 그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이석의 이사에도 그가 관여했는지 어쨌는지 꼽아보는 버릇이 생긴 것 말고는 탈 없이 잘 지냈다. 두 해가 흘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잠깐 매스꺼움이 일었지만 무심히 일터에 나갔다. 일하는 중에도 식은땀과 함께 구토가 났지만 일이 남아있어 꾹 참았다. 명치마저 답답해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동네 병원을 찾았다. 심한 체증에 걸렸거니 했다. 반가울 것 없는 이석이 제 자리를 이탈해 나를 흔들기 시작한 걸 몰랐다. 

      미련한 나를 찾아온 병은 집요했고 이탈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석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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